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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앞장서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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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용문사 작성일18-01-19 14:05 조회3,2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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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불교포커스에 실린 주지스님과의 인터뷰기사입니다.

2012년에 실린 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주지스님의 말씀을 읽어보시면...

신심이 나실 겁니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사전에 실린 ‘자유自由’의 뜻이다.
불교는 그런 자유를 꿈꾸고 가질 것을 가르친다.
그것도 시장바닥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은 시시껄렁한 자유가 아니라
크고 넓은데다가 깊이까지 갖춘 ‘대자유大自由’를 끌어안으라고 가르친다.

자유는 사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포섭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란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안 할 수 있는 것’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승낙은 했지만 원망이 크다’는 말이 자꾸 떠올라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법문을 청하는 것을 ‘청법請法’이라 이르는 것이고 보면
법을 전하는 이에게 법을 청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나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정해진 주제 없이 법문을 설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법을 듣는 이라면 몰라도 법을 전하는 이 누구라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일 터였다.
말하자면 ‘주제도 없고 특별한 질문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겠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무언가 부처님 가르침에 관계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에게는
주제가 있고 질문이 있는 것보다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남은 차례의 순례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심 작정은 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야 할 인연으로 부산의 정원사 주지 지각 스님을 소개받았을 때, 덧붙여진 한마디가 절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스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회가 생긴다면 당연히 바깥 출입을 자제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었다.

차가 굴곡 심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지대가 높아 보이는 곳에 이르자
네비게이터 속에서 안내를 종료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좁은 절 마당에서부터 시작된 높고 가파른 계단이 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차 문을 열어둔 채 난감해하고 있을 때 젊은 스님 한 분이 나타나더니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차 안에 앉은 채 인사를 하는 나를 보더니
합장한 손을 풀자마자 망설임 없이 무릎을 접고 넓은 등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요 특전이다.

젊은 스님의 넓고 두터운 등에 업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 뒤
멀리서 온 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주지 스님을 만났는데
인사를 드리자마자 성지순례 이야기부터 물었다.
인터뷰 날짜로 잡힌 날이 하필이면 성지순례를 떠나기 하루 앞이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여행인데 성지순례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더구나 출가한 사람에게 바랑 하나 말고 별다른 짐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는 것 아닌가. 몇 차례 성지순례를 경험한 뒤로 정해둔 원칙이 있다. 음식은 현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고, 옷을 포함한 짐은 최소한 작게 꾸린다는 두 가지다. 삶이 그러하듯 여행 역시 지고 갈 짐이 적어야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는 법이다.

자기 몸으로 겪은 경험의 냄새가 물씬 나는 그 말은
책에서 읽었거나 남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상식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런 느낌을 주는 말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

 

▶ 젊은 날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떠난 곳이 남인도 지역이었는데, 막연하게나마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꿀에 버무려 만든 미숫가루와 두툼한 옷 한 벌을 바랑 속에 꾸려 넣고 떠났었다. 그런데 준비해간 미숫가루는 반도 먹지 못했고, 옷도 여행을 마칠 때까지 끝내 바랑 바깥으로 나와보지 못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채 여행을 마치고 거렁뱅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뒤, 순례와 여행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만나는 것이 없고, 만나는 것을 통해 배우는 것이 없다면 순례와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절을 나설 때마다 짐을 가볍게 꾸리는 것을 첫 번째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고 있다.

따듯한 찻물로 입술을 축인 뒤,
‘승낙은 했지만 원망이 컸다’는 말에 대해 물었다.
칼럼의 제목에 ‘청법’이라는 말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칼럼은 ‘청법’보다 ‘수연隨緣’의 순례로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 듣는 것만큼이나
묵은 인연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중히 보고 있노라 말씀 드렸다.

 

▶ 가르침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저항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썩 잘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고,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한쪽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바깥 사람들에게 전할 만한 내용을 풍부하게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생각이려니와, 특히 말이 글로 바뀔 때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동안 대중매체와의 만남을 멀리해 온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도반의 청에 대해 승낙을 해놓고 뒤늦게 청을 넣은 도반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부산 정원사 주지 지각 스님. 원망했노라 말하는 스님의 얼굴에 그러나 원망의 빛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마도 원망이라는 말에 실린 것은 걱정이었을 것이다. 누구든 가지 않을 길을 나설 때 설렘만큼 걱정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이쯤에서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산중 아닌 도회에서 절 살림을 맡아 살면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궁금했다.

▶ 어려서 산에 들어온 나는 경전을 통해 불법을 배우기 전에 아버지 같은 은사스님에게서 부처님과 고승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스님들의 멋있는 삶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특히 한암 스님이 일제 치하에서 총독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볼 일이 있으면 자기가 올 것이지 무슨 이유로 사람을 오라가라하느냐면서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어린 마음에도 세속의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님의 기개가 부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스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세상은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끌기보다 따라가기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속인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스님도 지난 날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을지 궁금했다.

▶ 밥하고 나무하고 빨래하던 날들이 그리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런 시절을 살아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부처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던 날들이었고, 내가 해야 했던 일 중에 대부분이 부처님을 섬기고 배우는 일들로 채워진 시절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탁발을 출가자의 삶의 일부로 경험해본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탁발이 수행자의 본분을 잊지 않게 하는 중요한 일인 것인데, 그래서 탁발은 결코 부끄러운 일일 수 없는 것인데, 탁발을 마치 일하기 싫어 밥을 얻어먹는 것쯤으로 치부해버리는 시선과 그런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탁발을 금지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 중의 하나이다.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 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그러면서 스님이 이산혜연선사의 발원문 한 구절을 읊었다.
어린 날을 회상하는 듯 발원문을 읊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려서 익힌 것은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는다.
대학에서 한문강독을 들었던 교수님 한 분도 그런 말을 했다.
서울의 전통 있는 서당의 마지막 세대임을 자처하던 그 교수님은
주요 유교경전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외우는 분이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읽은 책 중에서는 그렇게 외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와 관련하여 출가자의 나이가 점차 고령이 되는 추세에 대해 물었다.

▶ 통계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워낙 출산을 적게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탓에 어린 나이에 출가하기를 기대하기가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가연령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거기에도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공부로서의 효율을 생각하자면 나이가 들어 출가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인데, 반대로 나이가 들어서 출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 물이 많이 들어있는 상태로 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그 물을 빼내는 데 또 그만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요즘 사람들은 배고픔을 몸소 겪은 옛날 사람들과 달리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여유가 있는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인 만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측면이 있고, 그런 세태를 반영하여 수행 또한 요즘에 와서는 물질적인 기반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스님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익혀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로서의 삶과 달리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도 신세대라 불려야 하는 이들이 있고  출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용으로는 수행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 말썽이 있던 정원사 주지를 맡고 나서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첫 천일기도를 하는 중에 오랫동안 끌어온 말썽거리가 해결되었다. 그 뒤로도 두 차례 더 천일기도를 했고, 그때마다 무사히 회향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수행자로서의 삶이 원력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살았다. 기도가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무엇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 대신 무엇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 그런 기도가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을 믿는다. 기도를 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수행자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기도에 대해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 냉한 기운 가득한 법당에서 목탁을 치고 기도를 하다 보면 손가락이 곱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을 시킬 수 없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기도다. 몸보다 정직하고 바른 것이 없다. 내가 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가르침은 한계가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내 바람대로 이끌 수가 없다는 것을나는 천일기도를 해오면서 배우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세인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으로 들어온 이들이 있다.
조영남을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세시봉친구’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시장에 팝송과 포크송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이들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도 세월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고
그들이 물러나 있는 동안 가요시장은 아이돌과 댄스가수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들이 함께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 방송이 나간 뒤 70년대를 젊은이로 살았던 이들의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한번 일어난 열풍은 TV 출연, 전국순회공연, 해외공연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데
문제는 만일운동萬日運動을 계획해서 실천하고 있다는 송창식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그 운동을 마무리하고 싶어했고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서 하는 그 운동은 그의 해외여행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사람에 따라 그의 고집을 집착으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었을 테지만
송창식은 어떤 말에도 요지부동,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고
만일운동을 끝내려면 아직도 칠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해외공연을 떠난 그의 친구들이 함께 오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으로
공연장을 빈 자리 없이 가득 메운 관중들을 향해 전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속은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는 그런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도 천일기도를 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한 말을 내 행동으로 번복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수행의 바탕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경전 속에 들어있는 말씀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향기는 그것이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으로 꽃 필 때만 퍼져나갈 수 있다. 아무도 억지로 시킬 수 없고 억지로 시켜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고 하실 정도였다. 불교는 철저하게 혼자서 살아낼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비로소 소기의 지점에 이를 수 있다. 나는 송창식이라는 사람이 만일운동을 잘 해내기를 바란다. 그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또한 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다른 이유로 보고 싶어하는 이들을 찾아주지 않았다면 욕을 할지 몰라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칠 년보다 더 긴 세월을 기다려서라도 그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해줄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차탁 바로 옆 책상 위에서
큼지막한 황금돼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탐욕을 상징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는 절집에 왠 돼지인가 물었다.

▶ 몇 차례 성지순례 다니면서 신도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살림살이가 우리만 못하다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일 뿐, 만나는 수행자와 불자들마다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아이들을 보는 동안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도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앞으로 천일기도를 하는 동안 최소한의 일정액을 정해두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각자의 집에 있는 돼지저금통을 복전이라 생각하고 그 안에 보시금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천일기도가 끝나는 날 절에 모여 돼지저금통 안에 든 보시금을 모아 우리가 다녀온 그곳에 작은 학교를 건립해보자고 약속했다. 지금은 지극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원력과 기도가 이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스님이 덧붙인 이야기가 가슴 뭉클했다.
한국인 스님이 캄보디아의 한 수행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불교자료를 구해 복사를 하려고 시내에 나갔다가
패스포트가 든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리는 사고가 생겼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타고 간 택시를 찾을 길이 막연했던 스님은
가방 안에 든 여행경비와 패스포트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 복사점을 통해 연락을 해온 기사를 만났고
가방 안에 들어있던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달러와
패스포트를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스님의 사례 의사에 대해 손사래를 치면서
자기가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으로 이미 큰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스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공양까지 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우리가 잃은 것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주변의 대다수가 그렇게 때묻지 않은 맘으로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 어째서 꼭 자랑거리이기만 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하는 생각이 그러하듯
살만한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아직 그렇지 못한 나라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보니 돼지의 웃음이 보살의 미소였다.

인터뷰는 연말에 하는 것이지만
기사가 올라가는 것은 새해가 될 것이다.
문자로 만날 불자와 독자들에게 새해 선물이 될 법어를 부탁 드렸다.

▶ 어려서 전해 들은 어른스님들의 이야기에는 닮아보고 싶은 내용이 많다. 특히 한국불교 계맥의 중흥조로 추앙 받는 자운 스님의 경우, 당신이 수행과 공부가 함께하는 도반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겸양의 덕을 잃지 않았던 분으로 유명하다. 자기 자신을 가진 것보다 과장되게 포장해서 알리려고 하는 요즘 세상에서 되새겨 음미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올려 내가 올라가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칭찬할 수 없거든 흉보는 것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지금 세상은 오로지 이기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안타깝다. 모든 것을 승자와 패자로 나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함께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힘은 힘 그 자체의 크기보다 방향이 일치할 때 더욱 커질 수 있다. 칭찬하고 화합하는 삶, 그리고 남보다 내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리하여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끌고 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다.

용의 해 임진년,
스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다면
누구라도 승천을 가능성을 가진 잠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셔온 글입니다...

스님을 뵙고.. 화엄경 입법계품의 53선지식 중 한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늘 말보다 실천이 앞서고..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으십니다.

곁에서 말없이 따라만 해도 본보기가 될 분입니다.

늘 따로 선지식을 가까이하고자 열망합니다.

실은 파랑새 이야기처럼  바로 곁에 선지식을 두고도 말입니다.

그래서 용문사 식구들은 늘 든든합니다.

이런 어른과 하루하루를 수행해 나가니..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으리라.

 

혹여 이 글도 스님께 조금이나마 누가 될까 조심스럽습니다.

스님의 원력이 스님과 용문사 대중과 인연있는 분들에게

큰 힘이 될걸로 믿기에 감히 어리석은 소견으로..

기사와 약간의 소감을 넣었습니다. 

원력에 대해 사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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